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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1 · 1편·기관 금융·

호송선단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엇을 남겼나

1927년 쇼와 금융공황에서 YCC까지. 은행이 망하지 않는 나라를 만든 호송선단 방식이 무엇을 지켰고, 그 뒤에 무엇이 남았는지 한 세기를 따라간다.

세계 금융을 이야기할 때 일본은 빼놓을 수 없는 나라다. 엔화는 여전히 국제 금융시장의 주요 통화이고,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변화는 일본 안에서 끝나지 않고 세계 채권·외환시장과 자금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은행과 보험사 역시 세계 곳곳에서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저금리 환경을 경험한 나라 중 하나다. 제로금리부터 양적완화, 마이너스금리, 수익률곡선통제(YCC)까지 지금은 익숙해진 여러 통화정책을 다른 나라보다 먼저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행은 세계 어느 중앙은행보다 시장 깊숙이 들어간 중앙은행 중 하나가 됐다.

이런 일본의 움직임은 한국에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급변하는 세계 금융질서와 주변국의 정책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개인에게는 시장의 큰 흐름을 읽고 자신의 자산을 지키고 불리기 위해 일본 금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주요 경제국이면서 세계 금융시장에서 큰 자금을 움직이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크립토로 시선을 옮겨도 일본은 독특하다. 마운트곡스와 코인체크처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형 사고를 남들보다 먼저 겪었고, 그때마다 거래소 등록제와 자율규제 같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왔다. 지금 일본의 크립토 규제가 유독 신중하고 촘촘해 보이는 것도 이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저금리, 중앙은행의 시장 개입, 강한 금융감독, 그리고 크립토 규제까지.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특징들은 사실 따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왜 일본은행은 이렇게까지 시장에 깊숙이 들어오게 됐는지, 왜 일본은 금융회사를 강하게 관리하는 전통을 갖게 됐는지, 왜 큰 금융사고가 터질 때마다 제도를 새로 만들고 감독을 강화하는 방식이 반복됐는지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같은 역사에 닿는다.

그 출발점을 1990년대 버블 붕괴나 1985년 플라자합의로 잡기에는 조금 늦다. 지금 일본 금융의 체질은 그보다 수십 년 전부터 금융위기와 전쟁, 경제 재건을 거치며 만들어졌다. 그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돌아볼 사건이 1927년 쇼와 금융공황이다.

1927년 쇼와 금융공황부터 2016년 마이너스금리와 YCC까지 일본 금융의 전환점 여덟 개를 놓은 타임라인
그림 1. 이 글이 따라가는 여덟 개의 전환점. 주홍은 은행이 실제로 무너진 두 해.

은행이 무너지는 공포

먼저 은행이 왜 망하는지 간단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은행은 사람들이 맡긴 돈을 그대로 금고에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예금으로 들어온 자금의 상당 부분을 기업과 개인에게 대출하거나 다른 금융자산으로 운용한다. 평소에는 모든 예금자가 동시에 돈을 찾으러 오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저 은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으러 오는데, 은행이 가진 자산 대부분은 대출처럼 당장 현금으로 돌려받기 어려운 형태로 묶여 있다. 실제 자산가치에는 큰 문제가 없는 은행이라도 단기간에 필요한 현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문을 닫을 수 있다. 이것이 뱅크런이다.

1920년대 일본에는 이런 충격에 취약한 은행이 많았다. 전국에 1,000개가 넘는 은행이 있었고, 상당수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형 은행이었다. 지역 유력자가 자신이나 관계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해 세운 경우도 있었고, 은행 자체가 작다 보니 대출이 몇몇 기업에 집중되는 일도 흔했다. 주요 거래처 하나가 흔들리면 은행까지 같이 흔들릴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에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불황과 1923년 관동대지진이 겹쳤다. 전쟁 중 호황기에 늘어난 대출이 부실해졌고, 지진 피해 기업과 관련된 채권 문제도 쌓였다. 그런데 기업의 부실을 바로 인정하면 그 기업에 돈을 빌려준 은행이 흔들리고, 은행이 흔들리면 다시 다른 기업으로 문제가 번질 수 있었다. 일본은 손실을 한꺼번에 드러내기보다는 시간을 벌면서 버티는 쪽을 택했다.

그러던 1927년 3월, 이미 불안하던 금융시장에 작은 불씨가 떨어졌다. 당시 대장성 장관 가타오카 나오하루가 국회 답변 과정에서 아직 파산하지 않은 은행을 두고 파산했다고 잘못 말한 것이다. 발언 직후 예금자들이 은행으로 몰려가기 시작했고, 뒤이어 대만은행과 스즈키상점의 부실 문제가 불거지면서 금융 불안은 전국으로 번졌다. 여러 은행이 영업을 중단했고 정치권까지 크게 흔들렸다.

1927년 쇼와 금융공황 당시 도쿄 나카노은행 앞에 예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흑백 사진
1927년, 도쿄 나카노(中野)은행 앞의 예금 인출 행렬. 사진: 朝日新聞(『日本写真全集 10』 小学館, 1987 수록),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물론 장관의 한 실언만으로 멀쩡하던 금융시스템이 갑자기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일본 금융 안에는 1차대전 이후 미뤄온 부실과 취약한 소형은행이라는 문제가 쌓여 있었다. 실언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문제를 촉발시킨 트리거였던 것이다.

은행을 합치고, 국가가 관리하기 시작하다

금융공황을 겪은 일본 정부가 더욱 확신하게 된 것은 규모 작은 은행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은행 통합 자체가 1927년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금융공황은 소형 은행을 정리하고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정책에 강력한 명분을 제공했다. 이후 은행법을 통해 자본금 기준이 높아졌고,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은행은 몸집을 키우거나 다른 은행과 합치거나 시장에서 사라져야 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선택이었다. 작은 은행 수백 개가 각각 취약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보다 규모가 크고 자본력이 있는 은행들로 정리하는 편이 금융안정에는 유리해 보였다. 실제로 일본의 은행 수는 이후 빠르게 줄어들었다.

1901년 1,867개에서 1945년 61개로 줄어든 일본 보통은행 수 라인 차트
그림 2. 1927년 이후 은행 수는 줄곧 줄었고, 1936년 방침 이후 속도가 붙는다.

그런데 1930년대 들어 은행을 합쳐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전시경제로 들어가면서 국가가 금융을 바라보는 목적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군수공장과 군함, 항공기뿐 아니라 막대한 규모의 국채 발행과 자금동원이 필요했다.

국민이 은행에 저축하고 은행이 그 돈을 기업에 대출한다면, 정부가 은행의 자금배분을 통제하는 순간 국민의 저축이 어디로 흘러갈지도 상당 부분 결정할 수 있다. 전국에 작은 은행 수백 개가 흩어져 있는 것보다 지역별로 큰 은행 몇 곳이 존재하는 편이 정부 입장에서는 관리하기 쉬웠다. 1936년 이른바 '1현 1행' 방침이 등장하고 은행 합병이 더욱 강하게 추진된 배경이다.

1920년대에는 작은 은행이 너무 취약하기 때문에 합쳐야 한다는 논리가 강했다면, 1930년대 후반에는 은행을 크고 적게 만들어야 국가가 자금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다는 논리가 더해졌다. 금융안정을 위해 시작된 은행 통합이 점차 국가의 자금동원을 위한 장치로 성격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대장성(大蔵省)이었다. 지금의 재무성에 해당하는 조직이지만 당시 대장성은 예산과 세금뿐 아니라 금융행정과 은행 감독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은행 입장에서는 단순한 감독기관을 넘어 사업 범위와 경쟁의 방식까지 좌우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정부는 어떤 산업에 자금을 공급해야 하는지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1942년 일본은행법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역시 국가정책에 맞춰 통화와 금융을 운영하는 성격이 강하게 부여됐고, 전쟁 말기의 일본 금융은 정부가 방향을 정하면 은행들이 그 방향으로 돈을 보내는 거대한 자금배분 시스템에 가까워졌다.

전쟁 이후

1945년 일본은 패전했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던 금융통제 시스템 역시 함께 사라져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미군정 아래에서 전시체제의 여러 제도가 해체됐고 재벌개혁도 진행됐지만, 국가가 금융을 일정 부분 관리하고 한정된 자금을 중요한 산업에 집중시킨다는 운영 방식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전후 일본의 상황에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경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또다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철강과 전력, 조선과 제조업을 복구해야 했고, 수출산업을 키워 외화를 벌어야 했다. 반면 자본은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기업과 산업에 돈을 고르게 나눠줄 수는 없었다.

전쟁 중에는 국민의 저축이 은행을 거쳐 군수산업으로 흘렀다면, 전후에는 철강·전력·조선·제조업 같은 경제 재건의 우선순위 산업으로 목적지가 바뀌었다. 전쟁 때의 금융제도가 그대로 유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는 정부가 방향을 잡고 금융기관을 통해 자금을 배분한다는 사고방식은 전후에도 상당 부분 이어진 것이다.

가계 저축이 은행을 거쳐 전시에는 군수산업, 전후에는 철강·전력·조선으로 흐르는 구조를 그린 흐름도
그림 3. 파이프는 그대로, 출구만 바뀌었다. 대장성이 배분을 지시하는 구조는 전후에도 이어진다.

결정적으로 이 방식은 성공했다. 195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고 정부와 은행을 중심으로 자금을 산업에 집중하는 시스템도 정당성을 얻게 됐다. 가계가 저축하면 그 돈이 은행으로 들어가고, 은행은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며, 기업은 공장을 짓고 설비를 늘려 수출을 확대했다.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 구조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은행 중심의 금융과 정부의 강한 금융행정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일본 금융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표현인 '호송선단(護送船団) 방식'이 자리잡는다. 여러 배가 함께 이동할 때 가장 느린 배가 뒤처지지 않도록 선단 전체가 속도를 맞추듯, 일본 금융에서도 과도한 경쟁을 제한하면서 약한 금융기관이 시스템 밖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관리했다. 신규 진입과 지점 확대, 금리 경쟁, 업무영역 등이 규제됐고 금융기관에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파산시키기보다 다른 금융회사와 합병시키는 식의 해결이 선호됐다.

경쟁도 제한했지만 실패도 제한한 셈이다. 그 결과 전후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대형은행이 파산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고, 금융시스템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1927년 금융공황 이후 만들어진 '은행의 실패를 막는 시스템'이 수십 년 동안 성공하면서, 정부에는 금융을 관리하면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은행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겨도 시스템 밖으로 쉽게 밀려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쌓였다.

문제는 이런 전제가 유지되는 동안 금융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 금융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오랫동안 보호와 규제 속에서 움직이던 일본 은행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쟁에 들어가게 된다.

금융 자유화와 플라자합의가 만났을 때

1980년대 들어 일본 금융에도 자유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금이 필요하면 은행을 찾던 대기업들이 채권이나 주식을 발행해 시장에서 직접 돈을 조달할 수 있게 됐다. 은행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돈을 빌려주던 우량 고객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가계에서 들어오는 예금은 계속 쌓였고, 은행은 그 돈을 굴릴 새로운 대출처를 찾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중소기업과 부동산업체, 개인을 상대로 한 대출이 빠르게 늘었다. 문제는 이들이 기존 대기업처럼 오랜 거래관계를 통해 사업 내용을 훤히 알고 있는 고객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사업이 얼마나 잘될지, 빌려준 돈을 제대로 갚을 수 있을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에 비해 담보로 잡힌 부동산은 훨씬 단순했다. 당장 얼마짜리인지 평가할 수 있었고, 당시에는 땅값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강했다.

땅값이 오르면 같은 부동산을 담보로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대출이 늘어 다시 부동산으로 돈이 들어가면 땅값은 더 올랐고, 올라간 땅값은 또다시 대출 여력을 키웠다. 은행과 부동산시장이 서로를 밀어 올릴 수 있는 구조가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가 상승, 대출 여력 확대, 자산시장 유입, 재상승으로 이어지는 순환을 그린 다이어그램
그림 4. 담보 평가가 고리의 시작이다. 사업성 대신 땅값을 심사한 결과.

이런 상황에서 1985년 플라자합의가 이뤄졌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과도하게 강했던 달러 가치를 낮추는 방향에 합의했고, 그 결과 엔화 가치는 빠르게 뛰었다. 급격한 엔고는 수출 의존도가 높았던 일본 기업에 부담이었고,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금리를 낮추는 등 금융완화에 나섰다.

플라자합의만 놓고 일본의 버블을 설명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이미 금융 자유화로 가장 안정적인 대기업 고객을 잃은 은행들이 새로운 대출처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었고, 부동산 담보를 중심으로 대출을 늘리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엔고 대응을 위한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이 더해지면서 자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빠르게 흘러들었다.

자산가격이 오르는 동안 이 구조는 오히려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땅값이 오르면 담보가치가 높아지고, 은행은 더 많은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 새로 풀린 대출이 다시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들어가면서 가격은 더 올랐고, 그 결과는 은행이 내린 대출 판단이 옳았다는 근거처럼 받아들여졌다. 대출과 자산가격이 서로를 끌어올리는 순환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버블을 단순히 "플라자합의 이후 돈을 너무 많이 풀어서 생겼다"거나 "사람들이 투기에 빠졌기 때문에 생겼다"고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랫동안 정부의 보호와 규제 속에서 움직여온 은행들이 금융 자유화라는 새로운 환경에 놓였고, 기존 고객을 잃은 상태에서 부동산이라는 새로운 대출처로 향했다. 바로 그 시점에 플라자합의 이후의 금융완화까지 겹치면서 버블이 커질 조건이 한꺼번에 갖춰진 것이다.

버블이 꺼지고 나서야 드러난 것들

1989년 말 닛케이225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일본은행이 자산시장 과열을 우려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빠르게 바뀌었다. 주식시장은 1990년부터 급격히 꺾였고, 뒤이어 부동산 가격까지 하락하면서 상승장에서는 보이지 않던 문제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은행이 쌓아온 대출이었다. 예를 들어 10억 엔짜리 토지를 담보로 7억 엔을 빌려줬다고 해보자. 땅값이 계속 오를 때는 차주가 돈을 갚지 못해도 담보를 처분하면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땅값이 5억 엔으로 떨어지면 담보를 팔아도 대출금을 모두 건질 수 없고, 이런 대출이 쌓일수록 은행 장부에는 부실채권이 늘어난다.

문제는 이 부실을 한꺼번에 털어낼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손실을 그대로 인정하면 은행의 자본이 크게 줄어들고, 심한 경우 은행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결국 일본은 부실을 빠르게 정리하기보다 시간을 벌면서 버티는 쪽을 택했다. 1927년 금융공황 때와 비슷하게, 은행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자산가격이 다시 오르지 않는 이상 부실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았다. 경기침체가 길어지고 땅값과 주가가 계속 약세를 보이면서 은행의 문제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버블 붕괴의 후유증처럼 보였던 문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금융시스템 전체의 문제로 번지기 시작했다.

결국 1997년 일본 금융은 더 이상 기존 방식으로 버티기 어려운 순간을 맞는다. 그해 11월 산요증권과 홋카이도척식은행, 야마이치증권 등 대형 금융기관들이 잇따라 무너졌다. 특히 산요증권의 파산 이후 금융기관끼리 돈을 빌려주는 단기금융시장에서도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서, 금융회사들 사이의 신뢰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무너진 것은 개별 금융회사 몇 곳만이 아니었다. 전후 수십 년 동안 유지돼온 "일본의 금융기관은 결국 시스템 안에서 구제될 것"이라는 믿음도 함께 흔들렸다. 1998년에는 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까지 국유화되면서, 약한 금융기관을 다른 은행과 합병시키며 버텨온 호송선단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책임은 자연스럽게 대장성으로 향했다. 대장성은 전후 일본의 금융과 산업정책을 이끌며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핵심 기관이었지만, 동시에 금융회사들을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관리해왔다는 비판도 받고 있었다. 버블 형성을 막지 못했고, 붕괴 이후 쌓여가는 부실채권에도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는 책임론이 커지면서 금융감독 기능을 대장성에서 떼어내야 한다는 요구가 힘을 얻었다.

결국 1998년 금융감독청이 출범하면서 금융감독 기능은 대장성에서 분리되기 시작했고, 이후 현재의 금융청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 일본은행법도 개정되면서 일본은행의 독립성과 정책 결정의 투명성이 제도적으로 강화됐다. 전쟁과 고도성장을 거치며 만들어진 대장성 중심의 금융질서가, 버블 붕괴와 금융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금융 실험장이 된 일본

감독체계를 뜯어고치고 부실은행을 정리했다고 해서 버블 붕괴가 남긴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사이 일본 경제는 장기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문제에 빠져들었다. 기업과 가계는 새로운 투자와 소비에 나서기보다 빚을 줄이고 현금을 쌓는 데 집중했고, 수요가 살아나지 않으니 물가도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은행을 살려놓고 보니 이번에는 경제 전체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일본은행은 경기 회복을 위해 금리를 계속 낮췄고, 결국 1999년 제로금리 정책을 도입했다. 하지만 금리를 사실상 0%까지 내려도 경기와 물가는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았다.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여지가 거의 사라지자 2001년에는 기존처럼 금리만 조절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금융기관이 일본은행에 보유한 당좌예금 잔액을 늘리고 국채 매입을 확대하는 양적완화에 들어갔다. 지금은 익숙한 정책이지만 당시 주요국 중앙은행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시도였다.

일본이 이런 정책을 남들보다 먼저 선택한 것은 특별히 금융정책에 앞서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 다른 나라보다 먼저 기존 통화정책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기준금리를 아무리 내려도 경제가 움직이지 않는 상황을 주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먼저 경험했고, 기존에 쓰지 않던 방법까지 꺼내야 했다. 일본은 원해서 세계 금융의 실험실이 된 것이 아니라, 먼저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실험해야 했던 셈이다.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일본이 먼저 겪었던 문제가 미국과 유럽에도 나타났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와 유럽의 중앙은행들도 금리를 빠르게 낮췄지만 그것만으로는 충격을 막기 어려웠고, 결국 대규모 자산매입을 비롯한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꺼내 들었다. 일본이 1990년대부터 씨름해온 문제와 대응방식이 10여 년 뒤 세계 주요국의 문제가 된 것이다.

일본의 실험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3년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취임한 뒤 일본은행은 기존 양적완화를 훨씬 확대한 양적·질적 금융완화(QQE)를 시작했다. 국채를 대규모로 사들이며 시중에 공급하는 자금을 크게 늘렸고, 그래도 목표한 물가상승이 나타나지 않자 2016년에는 마이너스금리까지 도입했다. 같은 해에는 단기금리뿐 아니라 10년물 국채금리까지 일정한 수준으로 유도하는 수익률곡선통제(YCC)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행과 금융시장의 경계는 점점 흐려졌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정하는 수준을 넘어 국채를 대규모로 사들이고, 장기금리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움직일지까지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됐다. 수십 년에 걸친 이런 정책의 결과 일본은행은 세계에서 금융시장에 가장 깊숙이 들어온 중앙은행 가운데 하나가 됐다.

오늘날 일본은행이 정책 방향을 조금만 바꿔도 엔화뿐 아니라 세계 채권과 외환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일본의 거대한 금융자금과 오랜 초저금리 환경이 세계시장과 깊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은행을 이해하려면 제로금리나 YCC라는 개별 정책만 볼 것이 아니라, 버블 붕괴 이후 30년 넘게 이어진 시행착오 전체를 함께 봐야 한다.

마무리

지금의 일본 금융을 보면 서로 별개의 현상처럼 보이는 특징이 많다. 금융회사에 대한 강한 감독, 일본은행의 이례적으로 깊은 시장 개입, 오랫동안 이어진 저금리와 막대한 국채 매입까지 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일본만의 독특한 정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들은 모두 이전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만들어졌다.

1927년 금융공황을 겪은 일본은 은행의 실패가 금융시스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을 통합하고 감독을 강화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이 구조는 국가가 자금을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수단이 됐고, 패전 이후에는 다시 경제 재건과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금융시스템으로 활용됐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호송선단 방식은 수십 년 동안 일본 금융에 안정성을 제공했지만, 금융 자유화와 버블경제를 만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1990년대 버블이 무너지자 일본은 다시 제도를 손봤다. 부실은행을 정리하고 대장성에 집중돼 있던 금융감독 기능을 분리했으며, 일본은행의 독립성도 강화했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동안 일본 경제는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빠졌고, 일본은행은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마이너스금리, YCC처럼 기존에 없던 정책을 차례로 실험해야 했다.

이렇게 보면 일본 금융사는 위기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과정에 가깝다. 이전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다음 시대에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고, 일본은 그때마다 금융시스템을 다시 손봤다. 지금의 일본 금융은 어느 한 시점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이런 선택과 시행착오가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다.

그래서 현재 일본은행의 정책이나 금융당국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오늘 발표되는 금리 결정이나 경제지표만 봐서는 부족하다. 일본이 왜 금융안정을 중요하게 여기게 됐는지, 왜 국가가 금융에 깊게 관여해왔는지, 그리고 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실험하게 됐는지를 함께 봐야 하는 것이다.